2015년 12월 4일 동아일보 20면에 '추락하는 지상파 코미디'라는 글


개콘의 10%대 시청률이 9.9%의 한자리 숫자로 기록

시대의 화두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 등등 

그리고 인터넷 범람으로 인한 TV 방송의 한계라는 내용

그러나 희망은 있다?라는결말


음...


고작 10%대에서 9.9% 0.1% 떨어진것이 그렇게 기사거리던가?


이글에서 느낀점은 기사 내용에 포함된 '간접광고(올레TV)'와 자극적인 헤드라인,

그리고 출처가 불분명한 기사내용


개그맨 최양락은 “대중들이 온라인을 통해 방송개그보다 다양하고 자극적인 내용들을 접하고 익숙해져 있다”며 “비속어 사용에도 제약이 따르는 방송프로에서 ‘바른말 고운말’만으로 재미를 유발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욕설, 비속어 등이 난무하는 케이블 모 개그프로

가족이 함께 방송보기 부끄러운 행위들...

자극적이어서 좋은가요?


가족이 모두 볼 수 있는 프로 개그 콘서트...


글쎄...


코미디가 재미없어진게 아니라...


미디어의 다양화로 인한 TV시청 감소가 원인같은데요?


일요일 전체 시청률 중 5위를 차지한 개콘이 이런 기사를 받아야 하는가요?





영화 '신의 한수' 옥의티


역중에 주인공이 감방에서 교도관에게 바둑을 가르쳐 주면서 교도관이 전국대회 우승까지 하게된다.

이 장면에서 교도관의 계급이 바뀌어 있다는...


계급이 말똥한게였다.

그러나 우승한 후에 말똥 두개의 옷을 입고 있다.

설마 이런것도 바뀔까?

1계급급진이 얼마나 힘든것인데...



[컬러 앤 라이트]

리얼리즘을 위한 색과 빛을 그리는 방법

- 제임스 거니 저-


얼마전에 인터넷에서 컬러에 관한 책들을 검색하다가 구입하게된 서적이다.

그림과 함께 컬러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책의 무게가 사당해서 가지고 다니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가츠시카 호쿠사이 [葛飾北斎, Katsushika Hokusai, 1760~1849]

일본 에도시대에 활약한 목판화가로 우키요에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삼라만상 모든 것을 그림에 담는 것이 목표였던 그는 일생동안 3만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으며,
연작인 《후가쿠 36경 富嶽三十六景》은 일본 풍경판화 역사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의 작품은 모네, 반 고흐 등 서양의 인상파 및 후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주요작품
《붉은 후지산 Red Fuji》(c. 1825),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 The Great Wave of Kanagawa》(c. 1825),
《고이시가와의 아침 설경 Snowy Morning at Koishikawa》(c. 1830) 
 
 
 
1760년 일본 에도(지금의 도쿄)에서 출생하여 1849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아호는 슌로(春郞), 소리(宗理), 다이토(戴斗), 가쿄진(畵狂人), 이이쓰(爲一), 만지([卍). 5세 즈음에 숙부인 나카지마 이세(中島伊勢)의 양자가 되었으나 후계자가 되지 못하고, 15세 무렵부터 책대본가게에서 일하던 중 목판화 기술을 익히며 우키요에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1778년 그의 나이 19세에 우키요에의 대가인 가츠카와 순쇼(勝川春章)의 제자로 들어가 본격적인 회화 수업을 받았다. 당시 그는 고급 매춘부와 가부키 극의 배우를 그린 판화로 크게 인기를 얻었다.

호쿠사이는 30세가 넘어서면서 가츠카와파라는 우키요에 파벌의 범주를 넘어서서 다양한 회화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여러 화파들을 섭렵해 나갔다. 가노파, 스미요시파, 린파, 셋슈파에서부터 중국화와 서양화에 이르기까지 그는 자기혁신에 대한 강한 의지로 끊임없는 변신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파행은 보수적인 회화계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이기에 결국 그는 가츠카와파로부터 파문을 당하게 되었다.

1798년 에도의 풍경을 연작으로 제작한 것을 계기로 풍경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연극적인 소재의 화려한 그림을 거부하고 풍경에 자신의 예술가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담아 표현하였다. 40대 중반부터 약 10년 동안은 장편 전기소설인 요미혼의 삽화를 그리는데 전력하였다. 또한 50대 중반 무렵에는 《호쿠사이 만화》라는 소묘집을 통해 일상의 모습을 경쾌하게 그려냈다. 그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후가쿠 36경 富嶽三十六景》(후가쿠는 후지산을 일컬음)과 《후가쿠 100경 富嶽百景》은 그의 나이 70대에 그려진 것이다.

그는 평생동안 93회의 이사와 30회 이상이나 자신의 호를 바꾼 기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있는 곳에 물들지 말 것'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그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때로는 풍속화로, 때로는 화조화로, 또 육필화로 끝없는 변화를 모색한 그는 스스로가 칭한 그대로 가쿄진(畵狂人 그림에 미친 화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요 작품에는 《어부 아내의 꿈 The Dream of the Fisherman's Wife》(c. 1820), 《붉은 후지산 Red Fuji》(c. 1825),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 The Great Wave of Kanagawa》(c. 1825), 《고이시가와의 아침 설경 Snowy Morning at Koishikawa》(c. 183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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